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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리뷰/미디어

슬램덩크 명장면&명대사 - 농구가 하고 싶어요

by URBAN 201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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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명장면&명대사 - 농구가 하고 싶어요





 

아마 정대만의 이러한 처절함을 슬램덩크의 명장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정대만의 솔직어린 이러한 심정, 그리고 마음속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자신과의 갈등을 우리 모두에게도 있는 듯하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되는 일" 사이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잘 통제하여 극복했다는 마음을 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 솔직한 방황을 하기도 한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개개인만이 알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모순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다니는 프랑스 사상가이다. 

그는 굴곡이 많은 삶을 살고, 급진적이 계몽주의 위의 계몽주의 펼침으로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추문과 음모를 받아왔다. 

그가 이야기하는 모순의 의미가 다양하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 모순은 바로 덧없는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꾸밈과 경쟁", "자기과시"를 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다. 

인간은 꾸며진 그리고 제도화된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제 행복하지 않다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을 "덧없는 행복"이라 말을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모순을 폭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말초적 모순들을 공개하고 좀더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려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고백록"이다. 

물론 이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각종 제도(사회)가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는 식의 당대 사회비판에 근거한다. 

그러나 급진적으로 루소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일지라도 우리는 얼마나 자신모순으로 겉치장을 하는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정대만은 농구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환경과 주변인물들은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농구유망주였던 송태섭을 폭력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부상을 당하게 하려하고, 

농구팀에게 싸움을 걸어 농구부가 해체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듯, 이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 대부분은 농구에 대한 열정으로 차있다. 

농구를 하지 못하는 자신을 억울해 하지만, 여전히 그는 농구를 사랑한다.

 그저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주 약간의 자기갈등일 뿐이다. 

물론 정대만은 사실을 감추고 거짓을 사실인냥 믿고 있는 인물이기에 이것을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과연 그가 그의 식대로 농구부가 해체가 되었다면, 행복했을까? 

자신과 같이 많은 농구부원들이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면 속이 시원했을까? 

아니 아마도 더 큰 고통과 죄책감으로 힘들어 했을 것은 뻔한일이다.

도리어 정대만의 폭력사건은 자신이 억지로 닫아놓은 농구에 대한 열정을 향한 두드림이었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것, 그의 가슴이 시키는 것은 바로 농구코트에서 그의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는 끝내 안선생을 만나자마다 정말 삽시간에 그의 진실이 드러나 버렸다. 

만화이기에 시간을 측정할 수 없지만, 

꽤 오랫동안 농구부를 박살내기 위해 잘 준비했던 그가 안선생이라는 

그의 농구인생의 상징적 인물이 등장함으로 순간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도 쉽게 솔직해져 버렸다.

사실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마음이 그러한 것일 뿐이다. 

환경과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여타의 이유로 그것을 쉽게 드러낼 수 없다고 치자, 

그리고 모든 사회적 통념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치자.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나의 이성과 판단과 사회적 개념들과는 상관없는 가슴이 시키는 것이다. 

그뿐이다. 그것을 자존심으로 억압하거나 사회적 판단들로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연인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왜 좋냐는 질문을 받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나올 수 있지만, 

사실 그냥 가슴이 시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무엇을 측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몇가지로 정의내린다면 애정이 주는 다이나믹함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며, 

마치 개념정리 하듯 좋은 감정을 정리해버리면 얼마나 재미없겠나???

여자들과 다르게 남자들은 애같은 구석이 있다.

 밖에서 쇼셜포지션 때문에 인격적이고 중엄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안에서는 유치한 것들을 좋아할 수 있다. 

예를들어, 피규어, 만화, 게임 같은 청소년들이나 하는 것들 말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관념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 가슴이 좋아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론 가슴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설사 나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인 상황들이 그러하더라도 

우리는 먼저 가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설사 그 가슴이 시키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을 억누르지 않는 나 자신에게 떳떳해 질 것이며, 

훗날 많은 변명들을 늘어놓아 현 상황을 비극적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슴의 문제는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가슴의 소리를 닫고 살다간, 정말 중요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가슴은 열되 행함은 자기선택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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